서지정보
서명: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
저자: 사이토 고헤이(斎藤幸平)
역자: 정성진
출판사: Arte
출간일: 2024년 3월 13일
원서명: ゼロからの『資本論』
원서 출간일: 2023년
생각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은 디스이즈텍스트에서 구매한 책 중 한 권입니다. 구매할 때에는 주변에서 괜찮다는 이야기를 기억해서 고르게 되었고, 책장에서 꺼낼 때에는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가 꽤 두꺼운 책이었어서, 다음에 들고다니며 읽을 책으로 비교적 가벼운 책을 고르게 되었습니다. 요즘 제가 읽은 책들에서, 어쨌든 마르크스는 구체적인 인용으로도, 어떤 경향성으로도 자주 언급되기 때문에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본론과 마르크스의 이론의 입문서인 것처럼 접근하는 이 책은, 기존의 통념을 잘 풀어 설명하는 책이라기보다는 저자의 시선과 최신의 연구 결과를 반영한 독자적인 시각을 제공하는 책이라고 보는 게 좀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제로에서 시작하는'은 사전지식이 제로인 독자에게 손짓하는 수식어이면서, 동시에 기존의 시점을 부정하고 새로 쌓아 올리는 해설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한 셈이죠.
마르크스의 이론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이 어떻게 힘을 얻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잘 설명한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이야기일 것 같은데 아무튼 그걸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다보니, 오늘날 사람들이 말하는 여러 자본주의 비판의 대다수는 이미 마르크스가 한 이야기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고전의 힘이라고 할까요. 19세기 중반의 저작이 지금의 사회에도 유효하다는 것은 그 때의 문제의식과 지금의 문제의식에 공통되는 점이 있다는 이야기겠고 그건 그 때의 문제를 아직도 풀지 못한 것이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겠지요.
이 책은 어찌 말하자면 오늘날에 필요한 문제의식을 기준으로 마르크스가 이미 그 문제의식에 답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말한 책입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원하는 만큼 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가 남긴 여러 저술을 기반으로 그의 사유를 추적하는 것이죠. 완성되지 못한 저술을 찾는 것에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소련이 붕괴하고 중국이 자본주의 세계의 중요한 플레이어가 되고, 앞날을 보장하기 어려운 환경 문제를 앞둔 지금에 맞게 마르크스를 읽어보려는 작업이라고 하면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종류의 서술에는 좀 의아해지는 부분이 있는데, 예를 들면 100엔샵에 있는 상품들이 사용가치를 무시한 마케팅에 의존해 팔리는 쓰레기(pp.46-47)라는 건 너무 얄팍한 예시처럼 느껴집니다. 자기 집 배관 정도는 자기가 고칠 수 있는 독일 사회가 일본에 비해 덜 자본주의적이 아닌지(p.119) 묻는 부분도 그다지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자기 집과 정원을 보수하는 일(…더 나아가, 치과 치료, 무장과 치안)을 스스로 하는 걸 예로 들어 미국 사회를 일본 사회보다 덜 자본주의적이지 않냐고 물을 수 있을까요?
저는 게임을 만드는 노동자입니다. 이런 책을 읽으며 노동의 성격에 대해서 생각할 때 당연히 제가 하는 노동을 예로 들어 고민하게 됩니다. 게임 개발 노동이 모두 이렇다고 생각하지는 않고 경우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이런 노동 이론이 제가 일하는 환경에 적용될 수 있냐고 하면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소프트웨어 개발이라는 생산 라인 위에서 분업해서 일하기는 하지만 구상과 실행을 엄격하게 분리해서 실행만 하는 쪽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게 제 착각이건 뭐건, 노동에 관한 이런 이론이 제 노동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동시에, 제 일은 이 책에서도 언급하는 불쉿 잡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사람들이 모르는 게임 신작을 만들어서 출시를 준비하는 우리 팀이 어느 날 갑자기 그 일을 안 하게 되면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작년 스팀에는 19,000개가 넘는 게임이 출시되었고 모바일 앱 스토어에는 세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많은 게임이 출시되는데 그 중 (어쩌면 세상을 바꾸었을 지도 모르는) 하나가 없어질 뿐입니다. 세상에 있으나 없으나 큰 상관이 없는 오락거리의 사소한 배리에이션 버전을 만들기 위해서 자본은 돈을 쓰고 제게 월급을 줍니다. 당첨되었을 때의 수익률을 계산하면서 말이지요.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경영자 마인드니 뭐니 하면서 자기가 자본가인 것처럼 착각하며 일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에 있으나 없으나 하나 한 일을 하고 있는 게 마르크스적 생각을 통해서 본 제 노동의 실상이리라 생각합니다. 소프트웨어는 존재해 사회에서 떼어놓기 어렵게 되는 순간 기업이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첨병이 되며, 그 위에서 돌아가는 상품을 만드는 일은 거기에 부역하는 일이 아니기 어렵습니다. 저는 이 저자가 그리는 '유토피아'에는 제가 일해온 경험이 설 자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게임을 만드는 일이 없어지지는 않더라고 하더라도, 저처럼 실력 없는 사람에게 그 기회가 올 것 같지는 않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에 필수적인 노동이 좀 더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데 동의하고, 자본이 할 수 있는 바를 견제하는 데 동의하고, 자본을 견제할 방법으로써의 국가를 믿을 수 없다는 감각을 공유한다면, 대안을 생각하기를 멈출 수 없습니다. 저자가 마르크스에게서 발굴한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후의 새로운 접근은 아마도, 마르크스에게 내재된 사유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오늘날 그에게서 발견하고자 해서 만들어낸 계시일 것 같기도 합니다. 저는 그 계시가 꽤 마음에 들었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여전히 자본주의가 침투하지 못하는 영역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있는 도구를 잘 살피고 활용해 그 영역을 넓혀나가는 것이, 자본주의에 의존해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과제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