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정보
서명: 존재론적, 우편적
저자: 아즈마 히로키(東浩紀)
역자: 조영일
출판사: (도서출판)b
출간일: 2015년 8월 28일
원서명: 存在論的、郵便的: ジャック・デリダについて
원서 출간일: 1998년
생각
『존재론적, 우편적』은 서브컬처 평론가로 잘 알려진 아즈마 히로키의 출세작으로 알려진 책입니다. 데리다의 작업에 대해 다루며, '우편'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하여 그의 탈구축(해체) 개념이 어떻게 (저자의 분류를 따라) 1기 작업과 2기 작업에서 달라지는지를 조명하였고, 2기의 작업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제시합니다.
이 책을 읽게 된 건 와이프가 지정해 준 책이라서입니다.『천 개의 고원』을 읽고 나서 리좀에 대해서 와이프와 이야기하던 중, 와이프의 옛 읽기 목록 중에서 리좀에 비견할 수 있는 구조로 아즈마 히로키가 클라인 병을 제시했다고 하며, 자세히는 이 책을 읽어보라며 자신의 서가에서 책을 꺼내 주었습니다. 본인은 읽다가 그만뒀다면서 자신의 논문을 위해서 읽고 요약해 달라면서….
그렇게 읽게 된 책입니다만, 제가 데리다나 관련된 철학을 잘 아는 편이 아니다보니 이해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입문서로 『HOW TO READ 데리다』 내지는 『현대사상 입문』, 데리다의 저작으로는 『그라마톨로지』의 앞부분이나 『법의 힘』 정도를 읽은 게 다입니다. 이 책이 주로 다루고 있는 『우편엽서』는 언급된 것 같긴 한데 잘 기억은 나지 않고, 『서명 사건 콘텍스트』, 『유한책임회사 abc』와 설과의 논쟁은 『HOW TO READ 데리다』에 언급되어서 기억이 납니다. 대학 때 인지과학개론이라는 과목에서 나온 이름이라 설을 기억하고 있는데, 이럴 때 도움이 되는군요. 아무튼 산종과 우편성, 괴델적 탈구축과 데리다적 탈구축에 대해서는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저자가 꺼내온 클라인 병 모델입니다. 위상수학을 대충이나마 배운 입장에서는 왜 클라인 병이라는 도식이, 그 명명이 필요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바닥이 있고 꼭대기에 점이 있는데, 실은 꼭대기의 점이 바닥과 연결되어 있는 구조면 되는 것 아닌가? 같은 생각입니다. 실제로 책의 도식은 갈수록 그런 식으로 간략화됩니다. 수학적으로 클라인 병의 '바닥'은 별로 중요한 공간이 아니고, '꼭지점'과 같은 구조도 없지요. 이 클라인 병 도식은 그저 인쇄된 그림을 피상적으로 인용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의 클라인 병 도식은 이 책의 추천사를 쓰기도 한 아사다 아키라라는 저자의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에 등장한 것을 빌려왔다고 하는데, 놀랍게도 여기에 대해서 이미 제가 지적하는 것과 비슷한 논쟁이 있었다는 것을 이 글을 쓰기 위해 검색하는 도중 알게 되었습니다. 『지적 사기』를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하지만 저자가 보여주려고 했던 이미지는 대충 이해가 가기 때문에, 저는 이 책에서 다룬 꼭지점과 바닥이 있는 원뿔에서 바닥의 한 점과 꼭지점을 동치시킨 몫 공간('단락회로')으로서의 '아즈마 병' 도식을 수학적 '클라인 병'으로 가져가보려 합니다. 위에서 다루었듯, 클라인 병 구조에서 무언가를 '꼭지점'으로 가리키고 무언가를 '바닥'으로 지칭하는 것은 임의적입니다. 도넛을 머그컵으로 바꾸듯, 위상수학의 논리 안에서 원뿔의 꼭지점 부분은 슬슬 넓어지며 내려와 바닥 부분에 놓일 수 있고, 바닥 부분은 슬슬 말려 올라가 순환의 통로 부분이 될 수 있고, 순환의 통로 부분은 꼭지점 부분이 될 수 있습니다. 본질적인 구조가 바뀐 것은 없습니다. 단지 무엇이 '존재'이고, 무엇이 '현존재=괴델적 균열'이고, 무엇이 '클라인의 관=실존론적 구조'(p.288)인지는 연속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 제가 아는 클라인의 병을 이 도식에 적용하였을 때 얻게 되는 이해 내지 오독입니다.
결국 클라인의 병을 쓸 필요가 있었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네요. 연속적인 변화 없이 한 바퀴를 돌고 나면 안과 밖이 바뀌는 구조라거나, 그로 인해서 안과 밖을 구분할 수 없는 구조라거나 하는 것들이 그의 부정신학 시스템 설명에 중요한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위에서 제가 붙여놓은 오독은 사실 클라인의 병이 아니고 토러스여도 똑같이 이야기할 수 있지요. 저는 뭐 제 오독을 기반으로 추론하게 되네요.
저는 트위터를 합니다. 트위터에 이렇게도 해석될 수도 있고 저렇게도 해석될 수도 있으며, 농담인지 진지한지 헷갈리는 글들을 올리면, 그렇지 않은 글들과 마찬가지로 아무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됩니다. 몇 사람에게 전달되지 않는 글도 있는가 하면, 누군가의 해석이 붙어서 몇천 번 공유되고 몇십만 명에게 도달하는 글도 있습니다. 저자도 비슷한 것을 봤겠지요. 데리다가 산종이라고 이름을 붙인 건 이런 게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영문을 모른 채로 공유되고, 악의를 지닌 채로 해석되고, 선해하려는 사람들이 맥락을 붙이고, 다른 사람이 이 글에는 화를 내야 합니다!라고 주석을 단 것을 별 고민 없이 추종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존재가 어쩌니 현존재가 어쩌니 하는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커뮤니케이션을 우리가 어떻게 지켜봐야할지는, 조금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데리다의 '우편적' 작업을 다룬 이 책은 오늘날 읽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