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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砂の女)

정진명

서지정보

서명: 砂の女
저자: 아베 고보(安部 公房)
출판사: 신초샤(新潮社)
출간일: 1962년 6월 8일(문고본 2003년 3월 1일)
국내 발매 서명: 모래의 여자

생각

와이프가 일본 여행 중 헌책방에서 산 책들 중에는 아베 고보의 문고본이 잔뜩 있는데, 그 중 제일 유명한『모래의 여자』정도는 읽어보기로 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는 어떤 우화처럼 느껴집니다. 무기력하고 병적인 현대인이 그런 환경을 벗어나 '휴가'라는 일시적인 일탈을 추구하다 부조리하게 현대 문명의 보호를 박탈당하고 나서 역설적으로 주체성을 회복하는 이야기처럼 느껴지지요. 다른 한 면으로는, 부조리하게 현대 문명의 보호를 박탈당하고 나서, 이런저런 발버둥을 한 끝에 현재 상태에 안주하고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겁니다. 현재 상태에 안주하지만 주체성을 회복하는 건 꽤나 모순적으로 느껴지죠.

읽은 시기가 읽은 시기이니만큼, 저는 2024년 12월 3일에 겪은 일을 주인공이 겪은 일과 겹쳐서 보게 되었습니다. 부조리하고, 난데없이 찾아온 재난. 그 재난으로부터 빠져나가려는 시도. 실패. 중간 이후로의 이야기의 흐름은 현실의 흐름과 꽤 달라지고, 현실의 우리들은 이야기의 주인공과 달리 현재 상태에 있기를 일견 거부한 것처럼 보입니다만, 저는 과연 그런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예를 들자면 계엄이 유지되고 친위 쿠데타가 성공한 세상에서, 여전히 부정의한 세상에 복무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희생양을 착취하면서 '그래도 차별과 부정의 없는 세상을 만들긴 해야지. 하지만 오늘은 블로그 마감부터 맞추고…'라고 생각하는 저 자신에 대한 생각이 떠올라 두렵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과 다른 '최악의 사태'가 일어났을 가능성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살아있는 상황이 그런 '최악의 사태'와 얼마나 다른가를 알아나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지요.

뭐가 되었건, 어떠한 가치를 추구하며 사는 삶이 모순적이지 않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는, 모든 것이 연결된 사회에서는 특히 그렇지요. 저는 3부에서 보여주는 주인공의 상태가 그 모순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탈출을 위해 새덫을 놓지만, 그것이 계획대로 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생각하고. 결국 탈출할 기회가 주어지지만, 그것을 행동에 옮기지 않고. 그러나, 탈출 자체를 부정할 생각도 없고.

제 현실 또한 많은 모순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이것은 제 삶에서 열린 질문입니다. 아마 의도적으로 결론을 내지 않을 질문일 겁니다. 그런 면에서는 제가, 회색 세상에 있는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모래 구덩이 아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