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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레일 추리

레일 추리는, 추리(수사) 장르의 게임 중에서 플레이어가 엔딩에 도달하는 경로나 그 과정의 선택지들이 거의 분기하지 않는 게임을 가리킬 때 제가 쓰는 말입니다. 나열적으로는 역전 재판 시리즈나, 단간론파 시리즈, 『도시전설 해체센터』, 『The Testament of Sherlock Holmes』 등을 들 수 있겠네요. 그렇지 않은 게임은 진구지 사부로 시리즈, 『Pentiment』 등이 떠오릅니다.

저는 이야기가 있는 게임을 좋아하지만, 본 이야기를 다시 보는 걸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너는 이러이러한 선택을 '잘못' 했으므로, 이 이야기의 완성된 버전을 보고 싶다면 선택을 잘 해야 해"같은 이유로 다시 보는 건 질색이지요. 그 경우의 수를 다 체크할 시간도 없고, 그 과정에서 처음 볼 때는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스크립트와 감동하며 들은 성우의 연기를 감흥 없이 넘기게 되는 건 더 별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미완의 엔딩이 주는 씁쓸한 맛이나 그 역경들을 뚫고 진짜 엔딩을 볼 때의 즐거움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아닙니다. 결국 공략을 찾아서 모든 선택지마다 내가 '틀린' 선택지를 고르지 않는지를 체크하며 게임을 하게 되지요.

PS2로 나온 진구지 사부로 게임을 한두 개 해 보다 잘 적응하지는 못하고, 역전재판이 나온 이후로 계속 여기 붙들려 있게 된 게 제가 이 분류에 붙들려있게 된 이유입니다.『레일 추리』라는 건 제가 역전재판과 진구지 사부로가 다른 게 뭐였을지를 생각하다 나온 결론이었습니다. 명시적으로 틀린 선택지를 고르면 안 되는 상황이 아닌 상황에서는 모든 선택지를 눌러보게 되고(순서에 따른 결과 차이가 없으며), 오답을 선택하는 것이 다른 분기로 이어지는 대신 체력을 깎으며, 이전 단계에서 무슨 아이템을 안 들고 와서 다음 단계에서 어떤 루트로 갈 수 없어지는 일도 없지요. 그냥 단순한 외길 진행일 수도 있지만, 좀 더 어릴 때의 저한테는 이게 훨씬 나았습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고요.

『Pentiment』는 한 번의 플레이에서 할 수 있는 증거 수집이 제한적입니다. 정 반대의 디자인이죠. 한편으로는 실체적 진실을 묻어버림으로써, 누구를 범인으로 지목하는 것도 '오답'이라고 할 수는 없는 상태를 만들었는데, 이것도 재미있긴 했습니다. 하지만 게임이 제공하는 수많은 선택지들이 있지만, 2회차를 할 생각이 별로 들지는 않습니다. 그냥 제가 선택한 그 선택지들이 제게는 유일한 이야기인 거죠.

최근에 플레이한 『The Darkest Files』는 이런 부분에서 최악인데, 어떤 실체적 진실이 있고, 그 정답에 근접하지 못한 수만큼 감점이 되고, 에피소드가 종료될 때 100점 만점으로 점수를 보여줍니다. 게임에 대해서 제가 좋은 평가를 한 거랑은 별개로, 이건 별로입니다. 감동적인 닫는 이야기를 본 다음에 100점을 목표로 다시 플레이하거나… 오답을 선택할 때마다 흐름이 끊기는 걸 감수하고 로드하거나… 둘 다 별로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The Darkest Files』가 레일 추리가 아니냐? 흠… 제가 좀 더 분류를 정확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