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책임과 유한책임
상법에서, 어떤 회사의 채무가 사원(혹은 주주) 개인에게 얼마만큼 이전되는지에 관한 어휘지만, 대충 나는 생활에서 쓸 용도로 전용해서 쓰고 있다.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 어떤 일을 내가 하지 않았을 때, 결국 그 일이 내가 처리해야 하는 상태로 남는 사업이 무한책임한 사업이다.
- 거꾸로, 내가 어떤 일을 하지 않아도 조금 비효율적으로라도 내가 원하는 상태가 되는 것에 도달할 수 있으면 유한책임한 사업이다.
무한책임과 유한책임은 대개 어떤 일을 자신이 주인이라고 생각하며 하느냐와 관련이 있다. 대부분의 책임있는 성인에게 자신의 방을 청소하는 일은 무한책임한 일이다. 자기가 원하는 만큼 청소를 안 할 수는 있지만, 아무도 그 일을 대신해 주지 않으며, 그 방에서 자신이 살아야 한다. 싱크대에 설거지가 쌓여 있지만 그걸 딱히 지금 하지 않아도 자고 일어나면 배우자가 해 놓겠지, 싶은 사람에게 설거지는 유한책임한 사업이다.
"모든 사람이 작더라도 자신의 사업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하는 일군의 사람들이 있다. 사장으로 일을 하는 것과 월급을 받으며 일하는 것은 마음가짐이 다를 수밖에 없다며. 나는 이것도 무한책임과 유한책임의 차이로 본다. 유한책임으로 시간을 때우는 것은 어리석으며, 무한책임으로 일하는 자세를 익혀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주장으로 이해하고 있다.
나 자신의 생각은 이렇다. 어차피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인생을 무한책임으로 살아야 한다. 누가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칼로 찌른다. 우리 사회가 멀쩡하다면, 나를 칼로 찌른 사람은 그에 따른 책임을 질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가 내 삶을 복원할 책임을 진다고 해도, 칼로 찔린 나의 고통과 피해를 그가 가져갈 수는 없다. 병원에 누워있어야 하는 것도 나고, 상처가 아물 때까지 술을 마실 수 없는 것도 나다. 그러지 않았을 때 손해를 보는 건 나다. 그가 나를 부당하게 찔렀다고 드러누울 수는 있겠지만, 일어나서 손을 털고 걸어가야 하는 건 결국 나의 몫이다. 자신에게 닥친 부당한 일조차도 결국 자신이 이겨나가야 할 문제라는 걸 깨달은 사람은, 굳이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무한책임을 경험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나는 사람의 인생의 근본적 무한책임함에서 민주주의의 근거를 발견한다. 아무리 전제적인 사회에서도 개인의 삶의 책임은 궁극적으로 개인이 질 수밖에 없다. 그것을 명문화하고, 개인이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가 이러한 모습인 것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눈을 돌리지 말라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라는 게 내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