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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

자비출판

나는 자비출판한 책에 흥미가 가지 않는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면 결국 자비출판과 출판사를 통한 출판의 근본적 차이라고 내가 생각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출판사를 통한 출판은 출판사의 자원 투입과 저자의 저술을 통해, 최소한 두 플레이어가 이 책이 나올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합의했기 때문에 출간될 수 있는 것이다. 자비출판에는 그렇게 고민해줄 정도로 자원을 투입한 출판사가 없다. 그러니까 책 시장에는 출판사라는 어떤 큐레이터들이 있고, 그런 큐레이터를 통과하지 않아도 책을 낼 수는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큐레이션을 통과하지 "못한" 책들까지 관심 범위에 넣지는 않은 것이고.

이 생각을 옆으로 이어가면, 그러면 내가 굳이 지면을 얻지 "못한" 블로그 글을 읽는 것들이나 이렇게 쓰는 것에도 그만한 가치가 없나?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아니, 그렇지는 않다. 나는 다른 사람의 블로그를 읽는 것도, 글을 쓰고 다른 사람이 읽기를 원하는 것도 가치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한다. 그러니까 이 차이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이 차이에 대해서 답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다: 책에 요구하는 것이 블로그에 요구하는 것보다 많은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책을 읽는 게 더욱 많은 시간과 (많은 경우에) 돈을 요구하는 행위이고, 여기에 대해 기준이 더 높은 게 이상하지는 않다. 하지만 이 답은 "결국 블로그의 글은 책으로 정리된 글보다 가치가 낮지만, 비용도 낮기 때문에 허용되는 것이냐"는 질문을 부정할 수 없다. 나는 저 질문에 부정으로 답하고 싶다. 내가 블로그를 쓰고 읽어서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블로그를 읽는 것의 효용을 느끼는 것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상한 이야기이지만 나는 합리적인 이유 없이 책은 저자와 저자가 아닌 사람이 함께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역사적으로 그래왔고, 현실적인 이유로 그래왔고, 아직도 대다수가 그렇게 만들어지기 때문이라는 이유는 합리적이지는 않다. 출판 기술이 개인이 접근할 수 없는 가격도 아니거니와, 개인이 재고와 유통 고민을 끌어안을 필요가 없는 수단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책이라는 물건은 쓰는 사람과 만드는 사람이 함께 고민해서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동인지를 부정하는 것일까? 아니다. 자비출판과는 조금 뉘앙스가 다른 '독립출판'이라는 씬을 부정할 생각도 들지 않는다. 명백히 모순된 생각이다. 쓰는 사람이 만드는 사람인 것이 무엇이 다른 걸까?

여기까지 오면 결국, 나는 책이라는 것은, 결국 이것을 책이라고 인정해주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을 때 성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동인지와 독립출판은 그렇게 만들어진 책을 사 주고 읽어 주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눈에 보인다: 자비출판이라는 범주 안에 있는 책은, 내게는, 그렇지 않아 보인다. 자비출판 범주 안에 있는 책은 독자적인 씬을 구축하지 못한 상태로 기성 책들이 팔리는 형태에 얹혀 가려는 것으로 보인다. 돌고 돌아서, 나는 자비출판 책들이 출판 씬의 내부자들의 선택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읽는 건 책이 아니라 사실 출판관계자들의 한정된 관심인 것이다: 동인지와 독립출판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나는 그것들을 명백히 '책'과는 다르게 분류하는 셈이다.


나는 리디에서 신간 전권 훑기를 할 때 자비출판한 책을 거르지는 않는다. 내가 별로 읽을 것 같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책들 중에서도, 생성형 AI에 의해 대량생산되었으리라고 추정하는 제작자의 제품만 거른다. 자비출판에는 최소한 자신이 쓸 수 있는 내용을 책으로 내고 싶다는 저자의 바람이 있다. 그것을 책으로 낼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다른 사람이 평가하는 것은 합리적인 구조일 수 있으나, 다른 사람의 동의를 적절한 타이밍 안에 찾지 못하거나, 애초에 그런 동의에 관심도 없었던 내용에 가치가 없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안 될 일이다.

그런데 원래 그런 내용들은 세상 빛을 보기 어려웠다. 애초에 책이 될 만큼의 내용을 쌓는 것도 어려운 일이거니와, 그것을 책으로 만들어내는 일은 원래 어려운 일이다. 저자가 내용을 쓸 수 있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하기 어려웠던 일인 것이다. 그리고 2025년에는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위에서도 언급한 기술 발전들에 의해서다. 저렴한 인쇄기술. POD와 같은 생산 형태. 자비출판 전문 출판 서비스. 전자책. 대형 언어 모델을 포함하는 생성형 AI.

이런 변화는 결국, 더 많은 '검증되지 않은' 책들이 세상에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좋은 일이기도 하지만 소비의 선택지가 넓어지는 것은 선택 비용의 증가를 동시에 의미한다. 마케팅은 좀 더 고도화되어야 하고, 소비자는 어떤 상품을 골라야 할지 공부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큐레이션이 가치를 갖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의 입소문이나, 베스트셀러 목록, 혹은 서점의 진열이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역할을 하고, 신간 전권 훑기를 하는 내게 필요한 건 그것보다 훨씬 넓은 범위의 큐레이션이다. 그런 면에서 "출판사가 이 책의 내용에 돈을 쓰기로 결정했음"은, 내게 충분히 잘 작동하는 큐레이션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