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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

맞고 틀림이 어떻게 결정되는가

어떤 임의의 명제가 참이나 사실로 평가되거나, 거짓이나 헛소리로 평가되는 것은 결국 거기에 의견을 낸 사람들의 결정에 달려 있으며, 그런 사람들 이외에 참과 거짓을 결정해서 우리에게 답을 줄 수 있는 것―예를 들자면 신이나 진리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일 이것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은 법과 경찰력의 집행이겠지요. 사법은 의도적으로 어떤 명제를 판단하고 법을 적용하는 일을 특정한 사람들이 수행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경찰력의 집행 또한 이론상으로는 그러지 않아야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현장의 판단에 의한 "재량"이 법의 의도와 꽤 다르게 가는 걸 많이들 보았겠지요. 물론 이것은 그런 행동이 절대 옳다는 의도는 아닙니다. 그런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사법자와 집행자들은 따라야 할 엄격할 규칙들이 있고, 그 규칙에 어긋난 행동을 지적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입니다. 최소한 이상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시간에 따라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최선의 지식이 변화하는 분야로는 의학을 들 수 있겠지요. 정신질환 진단 기준이 변화하는 것. 비의료인을 위한 심폐소생술 교육이 변화하는 것. 무엇을 하고 무엇을 먹고 어떻게 운동하는 것이 건강에 좋은지. 사람의 몸은 그다지 바뀌지 않았을 수 있지만, 무엇을 하는 것이 최선인지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금씩 바뀝니다. 그리고 그런 지침들을 바꾸는 것은 사람입니다.

그래도 절대적인 참과 거짓이 있을 것 같은 수학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수학철학이나 증명불가능함 같은 걸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어떤 증명이 옳으냐 그르냐 같은 단순한 문제도 결국은 어떤 사람이 증명을 제시하고, 그 증명에 오류가 있음을 다른 사람이 지적하고 그 지적이 옳은지를 추인하거나, 그런 지적이 발생하지 않는 과정을 통해서 참임이 받아들여지게 되겠죠. 수학은 단지 그 과정을 훈련된 다른 사람들이 비교적 검증하거나 반증하기 쉽다는 것 이외에 차이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국은 다수 수학자들이 검증되었다고 증언하기 전에 어떤 증명이 참인지 알 방법은 없습니다.

자연이라는 채점 수단이 있는, 자연과학같은 건 어떨까요? 아무리 틀린 법칙을 주장하고 사람들이 다 그게 옳다고 해도, 자연이 실제로 그렇게 동작해주지 않으면 틀렸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자연이 실제로 그렇게 동작하지 않으면 틀렸다'라는 것도 사람이 정한 규칙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측정 한계와 오차 수용은 어떤 규칙 체계가 맞고 틀리다를 알아내는 영역보다는, 현실과 차이가 있는 모델로서 규칙 체계를 받아들이기를 권장합니다. 뉴턴 역학이 낮은 속도에서 특수 상대성 이론의 좋은 근사가 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결국 인류가 세상에 가지고 있는 모든 판단은 거기에 의견을 내는 사람이 정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그 결정과정은 아무 맥락 없이 다수결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문제를 고민하던 사람들이 세운 규칙에 따라 진행하자는 합의가 있는 것이지요. 사법은 재판관들이 하나의 독립된 사법 기관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법과 판례를 존중하며 스스로 판단하도록 훈련시키고, 수학은 형식과 논리를 엄수하면 틀릴 수 없(다고 여겨지)는 어떠한 작은 체계를 만들어서 그 안에서 형식과 논리를 전개하고 빈틈을 발견할 수 있어 모든 수학자가 같은 결론을 낼 수 있도록 훈련합니다. 대부분의 분야는 이렇게 극단적이지는 않지요. 좀 더 "사실"을 다툴 법한 여지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이 주장은 자칫 허무하게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진리와 옳음은 객관적으로 실증할 수 없고 시간에 따라 바뀔 수 있으며, 진실이란 그저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제일 이익이 되는 이야기가 선택받을 뿐이다." 하지만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오히려 그것이 이익이 되기 때문에 진실을 뒤집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무엇이 진실이 되는지에 대한 이 메커니즘을 직시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이 규칙을 어기는 이유는 그것이 결국 잘못이라고 충분히 지적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법의 집행이나 언론의 태도가 어떤 부류의 사람들과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 명백하게 차이가 난다고 하면, 그것은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취지가 충분히 반영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고치기 위해 에너지를 낼 수 있는 것은,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문제 의식이 있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곡학아세라는 말이 정치권에서 꽤 오래 전에 유행했습니다. 언론사의 이름을 달고 가짜뉴스를 하겠다는 사례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반지성주의가 팽배했다고 느껴지기도 하지요. 에코체임버라는 말도 꽤 널리 쓰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스스로의 이득을 위해서 사실을 왜곡하는 행위가 절멸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을 사회 중심부에서 몰아내려는 노력은 해야겠습니다. 우리 스스로와 우리 다음에 올 세대에게 요구할 덕성을 꼽는다면, 저는 자신의 이해 관계와 무관하게 세상을 인식할 수 있는 자세를 꼽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