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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하극상과 출세

일본의 소설 투고 웹 사이트 『소설가가 되자』에 투고되고 히트한 『책벌레의 하극상』의 일본어 제목은 『本好きの下克上』입니다. 직역하자면 '책을 좋아하는 사람의 하극상'일까요. 하극상은 직역을 했다기보다도, 한자를 그냥 적힌 대로 읽은 것입니다.

하극상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가장 먼저 다가오는 느낌은 부하가 상사에게 '대드는 것'일까요. 좀 더 나가면 부하가 상사의 뒤통수를 치고 상사에게 불이익이 되는 행동을 하는 것을 가리키는 느낌 정도? 『책벌레의 하극상』을 읽어보면, 책 제목이 될 정도로 그게 이야기의 핵심이거나 초반 훅이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인공의 신분을 가리키는 각 부의 제목을 보면 제목의 함의가 드러나는데, 1부부터 각각 「병사의 딸」, 「신전의 견습무녀」, 「영주의 양녀」, 「귀족원의 자칭 도서위원」, 「여신의 화신」입니다. 신분 상승이 명백하게 보이죠.

goo사전은 下剋上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래에 있는 자가 위에 있는 자에게 이겨서 권력을 손에 넣는 것. 남북조시대부터 전국시대에 이르는 동안 농민이 영주에 반항하고 봉기하여 잇키를 일으키거나, 가신이 주가 되는 이에(家)를 멸하고 슈고다이묘나 전국 다이묘가 되거나 하던 난세의 사회 풍조를 일컫는다.

일본어 下剋上이 무엇인지 찾다 보니 알게 된 것은 이 단어가 생각보다 역사적 맥락이 확실히 있는 단어라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어 위키백과를 보면 「하극상 일람」이라는 꼭지마저 있습니다. 한자만 놓고 보면 '아래가 위를 이기다' 뿐이지만, 일본에서는 (지배계층의) 권력 구조 변화가 일어나는, 특히 신분이 낮던 사람이 윗 신분으로 올라가는 특정한 서사를 지칭하는 단어인 셈입니다.

그러면 이제 저는 下剋上을 하극상으로 옮기는 것은 최적의 번역이 아닐 수 있다는 의심 아래에, 어떤 단어가 적합할지 찾게 됩니다. 역사적인 맥락을 고려하면 모반, 반란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데, 왠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이러는 이유는 제가 번역하려는 게 일반 단어인 下剋上이 아니라 작품의 제목인 『本好きの下克上』이기 때문이겠죠. 아무래도 작품에 맞게 신분 상승이라는 함의를 담는 단어를 고르고 싶고, 반란이라는 단어가 갖는 유혈 느낌은 '유쾌한 반란' 정도로 억누르고 싶습니다. 사실상 내용면에서 『盾の勇者の成り上がり』의 成り上がり와 크게 다르지도 않은 것 같고요.

그래서 떠오른 단어가 한국어에서 '신분 상승'을 좀 덜 노골적으로 가리키는 단어인 출세였습니다. 출세라… 뭔가 아닌 기분은 드네요. 참고로 일본 사회에서는, 出世라는 단어에도 역사적 맥락이 붙어 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에서 최고로 출세한 사람'이라고 불린다거나, 전국시대의 막을 내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력을 기른 하마마쓰를 출세의 도시라고 마케팅하는 것이 그것이지요. 원래 불교 용어로 출가와 비슷하게 쓰인 출세가 지금 의미가 된 것도 일본에서 출가를 통해 권력을 얻던 과정과 연관이 있다고 하지요.

하극상과 출세라는 단어는 어쨌든 한국어에서 쓰이는 단어입니다. 한자 단어이고, 원전을 타고 올라가 보면 중국 문헌에 있거나(하극상: 수나라 시절 『오행대의』) 불교를 통해 전래된(출세: 산스크리트 lokottara) 단어인데, 일본에서 어떠한 맥락을 가지고 쓰인 단어이고, 현대 일본어에서는 그런 맥락이 희미해진 채 사용되고 있습니다. 영향을 받았을 한국어에서도 나름의 변화를 겪었습니다. 下剋上을 하극상이라고 옮기는 데에서 생기는 오차는 그런 것이겠지요.

그래서 『本好きの下克上』을 어떻게 옮기면 좋을 것인가? 분하게도 제가 『책벌레의 하극상』보다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번역을 제시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굳이 하극상 말고 다른 단어를 꼽자고 하면 『盾の勇者の成り上がり』가 했던 것처럼 '성공담' 같은 단어를 꼽겠지만, 재미가 없습니다. 조사를 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下克上이라는 단어의 선택은 일본어 맥락에서도 작품의 내용보다 과격한 것이 맞다고 봅니다. 거기서 오는 효과를 한국어에 좀 더 맞게 옮긴다고 그 느낌을 없애버리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신분 상승의 뉘앙스에서 항명하는 뉘앙스로 조금 과격함의 종류가 달라지는 느낌은 있지만, 주인공 마인이 작중에서 '윗사람'을 대하는 태도의 다른 측면을 잘 보여주는 느낌이 들어 오히려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아리까리하네요. 번역은 불가능한 일이고 반역일 수는 있겠지만, 최소한 유쾌한 반역일 수는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