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세계관

모순을 받아들이는 태도

오늘날 살아가는 일의 복잡성을 생각해 본다면, 모순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태도, 혹은 모순을 적극적으로 해소하고자 하는 자세가 생각과 삶을 막다른 길로 내몰 수도 있다.

타인에 대한 평가

사람은 픽션 속 캐릭터가 아니다. 사람은 일관적일 수 없다. 어떤 사람을 본받아야 할 미덕의 구현체로 보거나, 모든 악덕의 집합체로 보려는 시도는 그 사람을 적확하게 보는 데에 있어서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백보 양보해 "일관성 없는 사람"같은 틀로 누군가를 인식하려는 시도는 자신이 보려고 채택한 방향과 다른 방향의 근거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무시하게 만들거나, 자신의 기존 판단을 아예 뒤집고 극적으로 전향하는 계기가 되거나… 아무튼 바람직한 일로 나타날 수는 없다.

자신에 대한 평가

자기 자신을 악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자기 자신의 악한 면모를 지적받았을 때 모순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사람의 내면은 모순을 받아들였을 때보다도 더욱 크게 훼손될 수 있다. 본인의 상식에 의거하더라도 악행이었던 경우에도 그렇지만, 본인은 그것이 악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뒤늦게 지적이 대두되는 경우―예를 들면 여성혐오나 육식―에는 더 크게 충돌할 수 있다. 불매운동과 같이 소비자주의적으로 악한 행동에 반대하는 제스처를 취하였다가, 그 모든 불매를 지속하다가 결과는 보이지 않은 채 본인의 삶만 '불편'해지는 결과를 맞닥뜨리는 것도, 이런 모순을 직면하게 만든다.

차라리 "내가 한 행위는 악한 행위가 아니다"라고 합리화하는 사람이, 그래도 선을 추가한다는 입장에서 나을 지도 모른다. "내가 이런 행위로 인해 선해질 수 없다면, 차라리 이익을 추구하겠다"며, 철학적으로 질문받지 않았다면 그럭저럭 선하게 살 수도 있던 사람이 극단적으로 변해버리는 것을 목격하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다.

세계에 대한 평가

선하게 살면 보답받는다, 모든 것보다 이익과 생존이 최우선이다 같은 명제부터, 기업은 합리적으로 행동한다거나 하는 믿음…. 그 모든 멘탈 모델은 개별 사례에 취약하며, 믿음과 반례 사이에서 발생하는 간극에 잘 대처하지 않으면, 주변에서 봤을 때 극단적으로 보이는 사고에 도달하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모순을 끌어안기

사람은 징거더블다운맥스를 먹으면서 제로콜라를 마실 수 있고, 소셜 네트워크의 악용을 비판하는 내용을 트위터에 작성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사회가 크게 변하기를 바라지만 자신의 행동에 박혀있는 여성혐오에 대한 인식이 없을 수도 있고, 나는 주변 사람에게 선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내가 인터넷으로 주문한 어떤 상품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것을 내 문 앞에 가져다놓은 이웃과 지구 반대편의 생산자를 착취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무조건적으로 긍정되는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고 싶은가, 어떤 방향으로 행동하고 싶은가일 것이다. 그것은 최소한 무언가를, 누군가를 하나의 단어로 설명하려 하는 것보다는 중요한 일이다.

안타깝지만 이 세상의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하나의 단어로 설명되는 것은 꽤 중요한 일이다. 나는 그 필요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