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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동시에 투약할 수 있는 양의 마약

마약 사건 보도의 상투적 어구로 '○○명이 동시에 투약할 수 있는 양'이라는 말이 있다.

지난 4차례에 걸친 한-태 합동작전의 성과를 살펴보면 작전 기간 중 마약류 누적 적발량은 총 156건, 385.5kg으로 이는 약 1,161만 명*이 동시에 투약할 수 있는 양에 달한다.(관세청, 강조는 필자)
경찰이 압수한 마약류는 3천여 명이 동시에 투약할 수 있는 양으로, 경찰은 마약 유통 경로와 구매자 등을 수사하고 있습니다.(MBC, 강조는 필자)
이들은 지난 6월부터 지난달까지 필로폰 6.643㎏, 케타민 803g 등 30만여명이 동시에 투약할 수 있는 마약류 수십억원어치를 4차례에 걸쳐 필리핀에서 국내 밀반입한 뒤 일부를 유통한 혐의를 받는다.(연합뉴스, 강조는 필자)

그런데 왜 '동시에' 일까? 동시성이 그렇게 중요한가? '○○명이 차례를 지켜 투약할 수 있는 양'의 마약이라는 표현도 말이 될까? 그냥 "○○명이 투약할 수 있는 양"이면 안 되는 이유가 있나?

다음과 같은 표현도 발견된다.

제주 성산일출봉 옆 광치기해변에서 66만명이 동시에 투약할 수 있는 마약이 발견됐다.(한겨레, 강조는 필자)

'66만명이 동시에 투약할 수 있는 양의 마약'과 '66만명이 동시에 투약할 수 있는 마약'은 좀 다른 것 아닐까? 이 표현을 보고 나니 66만명의 마약사용자가 편안하게 자리에 앉아 있고 누군가의 신호에 따라, 예를 들면 누가 무슨 버튼을 누르니까 동시에 어떠한 방법으로, 예를 들면 대충 혈관으로 약이 들어가서 동시에 마약을 투약하는, 그런 광경과 '어떻습니까? 66만명이 동시에 투약할 수 있는 우리 시스템은… 큭큭큭…'같은 대사를 하는 악당을 떠올리게 된다. 니네 게임 서버가 감당할 수 있는 동시접속자 수 최신 마약만 못하다 우우….

아무튼, '동시에'만 아니었어도 좀 나을까? 잘 모르겠다. 다음과 같은 사례도 있다.

…순수한 코카인의 총무게는 1,690㎏(포장지 포함 : 1988.67㎏)으로 약 5,700만 명이 한꺼번에 투약할 수 있는 양으로 최종 확인되었다.(해양경찰청, 강조는 필자)

'한꺼번에'도 굳이 필요한가 싶긴 하지만, '동시에'보다는 나은 것 같다. '한꺼번에'는 '동시에'와 같은 뜻도 있지만, '한 번에 소진하여/한다면' 같은 뜻으로 쓸 수 있으니까, 좀 더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겠고.

여기까지 쓰고 보니, '축구장 20개 면적'이라는 말을 '축구팀 40개가 동시에 경기할 수 있는 면적'이라는 말로 고쳐 쓸 수도 있을 것 같다. 기사의 언어란 참 어려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