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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문명라이크

시드 마이어의 문명』(이하 『문명』) 프랜차이즈 아래에서 여러 게임이 출시되었다. 게임의 여러 부분을 비슷하게 만들어서 출시하는 것이 좀 덜 꺼려지는 요즘, 공식으로 IP를 가진 회사 이외에도 문명과 비슷한 게임을 만들어 출시하는 것이 이전보다도 많다. 이 문서에서는 『문명』이 게임으로서 갖는 축과 그 갈등을 설명하고 『문명라이크』 작품들을 엮어 설명해보고 싶다. 그리고….

국민국가 시뮬레이터로서의 『문명』

나올 수 있는 여러 반론에도 불구하고, 문명은 역사를 시뮬레이션하는 감각을 제공함으로써 게임으로서 출발선에 선다.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으로 대륙 봉쇄령을 재현한다거나, 대한 제국으로 일본 제국을 폭격하거나, 간디로 핵미사일을 떨어트리는 감각을 제공하기 위해서 이 게임은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감각은 우리가 국가와 역사를 인지하는 감각에 크게 의존한다. 고조선을 비롯해 한반도에 있었던 국가와 거기 살았던 사람들의 역사가 대한민국까지 이어진다는 의식 없이 기원전 5000년부터 시작하는 대한 제국을 상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수천년을 이어지는 지도자 캐릭터와 함께, 이 민족/국가를 영광으로 이끌어야한다는 명령은 어떤 감정이입, 대체역사의 아이러니와 같은 감각을 유발한다.

역사를 버린 『비욘드 어스』

Sid Meier's Civilization V』를 재활용해 개발된 『Sid Meier's Civilization: Beyond Earth』는, 역사가 아니라 미래의 우주 개척을 다루는 외전이다.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선택할 수 있는 팩션은 현대의 국가로부터 이어진다는 느낌이 조금씩 있고, 원한다면 감정이입할 수 있다. 하지만 대체역사의 아이러니보다는, 새로운 모험에 중점이 가 있다고 해야겠다.

문명을 기준으로 이 방향에 있는 타사 게임으로는 『ZEPHON』이 떠오른다.

단일 국민 국가의 환상을 부순 『문명 7』

문명 7』의 가장 큰 변화는 게임을 세 개의 시대로 나눈 뒤, 하나의 플레이어(지도자)가 맡는 문명이 세 개의 시대에서 바뀐다는 것이다. 징기스 칸의 고대 신라가 대항해시대에 몽골이 되더니 근대에서 프로이센이 된다거나…? 잘 만들어졌다고 하면 이것은 문명 팬을 기준으로도 나쁘지 않을 수 있다. 한에서 명을 거쳐 청이 되며,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나가며 플레이한다거나…? 로마에서 노르만을 거쳐 근대 프랑스가 된다거나…? 하지만 그러기에는 고를 수 있는 문명의 개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보인다. 한국에 감정이입하며 플레이하는 입장에서 말하자면, 한국인의 지도자와 한국 문명으로 플레이할 수 있었던 전작과 달리(물론 확장팩까지 기다려야 했지만), 지도자는 있지도 않고 고대에서 신라를 플레이할 수 있는 게 전부다. 신라 다음에 어떻게 할까? 대항해시대에는 한반도를 지배했던 몽골, 근대에도 한반도를 지배했던 메이지 일본을 플레이하면 될까? 으음.

타사 게임으로는 『휴먼카인드』가 이런 방향에 있다. 이 시스템을 싫어하진 않는데, 메카닉이 의미있게 작동하려면 문명 선택지가 개성있어야 하고, 서사와 감정이입이 잘 작동하려면 문명 선택지가 매우 많아야 한다. 둘은 양립하기 꽤 어려워 보인다.

특정 지역에 집중한 게임들

Old World』는 고대 지중해 세계에, 『Oriental Empires』는 고대 중국에 집중한 게임이다. 둘 다 별로 관심 있는 역사는 아니라서 조금 하다 말았고 인상이 크게 없다….

멀티플레이어 게임으로서의 『문명』

나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서브레딧 등지를 보면 멀티플레이를 함께 할 사람을 찾거나 그 경험에 대해서 말하고 요구하는 사람들이 일정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싱글플레이(AI 플레이어 상대)에서도, 이 게임은 각 플레이어, 그러니까 '제국'간의 동등함을 전제한다. 오히려 과거작에서는 종속국 개념이 있었지만 도시국가의 등장과 함께 플레이어들의 제국과 그들과 동등할 수 없는 도시국가로 분류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패러독스의 역사 4X 게임들의 각 국가들은 부정할 수 없는 차이를 지니고 시작하며 플레이어는 강자의 입장을 누릴 수도, 약자의 입장을 누릴 수도 있다. 『문명』의 플레이어들은 기본적으로 동등하게 시작한다. 그리고 플레이어는 명확히 승리를, 다른 플레이어를 경쟁에서 제치는 것을 목표로 플레이해야 한다.

멀티플레이어 게임으로서의 『문명』은 역사 시뮬레이터로서의 『문명』과 충돌하는 부분이 있으며, 그 충돌은 게임의 해상도가 높아지면서 더욱 강해진다: 『문명』의 종교는 제국의 통치와 경쟁 도구 중 하나일 뿐이다. 수천년을 통치하는 지도자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친구와 함께 하는 보드게임이라고 생각하면 말이 되는 요소들이 역사를 시뮬레이션한다고 생각하면 해상도를 낮추는 요소로 작동한다. 『문명 7』의 초반 악평 중 지도의 모양이 흥미롭지 않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맵 생성이 플레이어간의 균형을 위해 조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잘 할 수야 있었겠지만, 그건 요즘 게임 개발 환경에서 기대하기 어려운 일 같다.

멀티플레이에 집중한 『Hexarchy』

Hexarchy』는 아예 이 면모에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메카닉의 축들은 꽤 문명과 비슷해 보이지만, 대부분의 행동과 연구를 슬더스라이크스러운 카드 플레이로 바꾼다는 발상은 이 게임을 역사 게임에서 더 멀리 보내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 장르를 멀티플레이로 즐기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어서 이 선택이 효과적이었는지는 내가 평가할 수 없지만, 흥미로운 면모인 것 같긴 하다.

내가 만들고 싶은 문명라이크

이렇게 게임들을 늘어놓고 보면, 내가 플레이해보고 싶은 게임이 어디쯤 위치하는지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되고, 그 상상과 비슷한 게임을 찾지 못하면 내가 만드는 상상을 한다.

나는 아무도 아닌 사람들로 시작하는 문명을 플레이하고 싶다. 아무도 아닌, 이제 겨우 농사를 짓고 모여 사는 것의 이점을 이해한 사람들로 시작하고 그들이 겪는 삶을 통해서 문명이 발달하는 감각을 느끼고 싶다. 바닷가에 살면 어업과 항해에 익숙해지는 사람들이 되는 것을 보고 싶고, 이웃한 사람들과 평화롭게 교역하면 장삿속에 밝은 사람들이 되고, 분쟁이 많으면 군사력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되고. 그리고 그렇게 아무도 아닌 사람들이 지구의 역사에 있었던 어떤 사람들과 닮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다른 플레이어의 침입을 막기 위해 길게 쌓은 성벽은 만리장성이 되고, 전 세계의 도서관 중에서 가장 큰 도서관에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의 이름이 붙고, 다른 국가의 독립을 기념하며 선물한 동상에 자유의 여신상의 이름이 붙는. 멀티플레이? 다른 플레이어들을 경쟁에서 제치기? 알 게 뭐냐. 나는 역사 시뮬레이터가 보고 싶고 내가 감정이입하는 사람들이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타일과 유닛은 육각형 기반으로 괜찮다. 『Ara: History Untold』처럼 비정형 지도일 필요는 없다. 멀티플레이로 갈 생각은 없지만, 우연성을 다루는 측면에서 『Hexarchy』처럼 카드를 뽑는 방식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왕조나 통치기구의 성격, 국체가 바뀌는 건 재미있을 것 같다.

이 생각을 구체화시켜서 내가 무언가를 만드는 날이 올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