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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

유머의 범주론적 해석

유머의 아이디어는 언어와 개념의 범주(Category)에서 실패하는 도식(diagram)이라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The existence of casual sex implies the existence of ranked competitive sex.

직역하면 "캐주얼한 성관계의 존재는 랭킹을 매기는 경쟁적 성관계의 존재를 시사한다." 정도로 할 수 있겠습니다. 좀 더 한국말스럽게 하자면, "캐주얼 섹스가 있다는 건 섹스 등급전도 있다는 소리다" 정도가 되겠네요.

이게 왜 유머가 될까요? 멀티플레이어 게임에는 플레이어에게 등급을 표시하지 않는 일반전(캐주얼 게임)과, 각각 판의 승패를 기록하고 플레이어의 표시와 매치메이킹에 반영하는 등급전, 혹은 경쟁전이라고 불리는 모드가 공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리그 오브 레전드나, 오버워치나, 스매시 레전드 같은 게임들 말이죠. 일반전은 좀 더 승패와 관련없이 가볍게 즐길 수 있고, 등급전이나 경쟁전은 좀 더 진지하게 게임을 하여 승리를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죠. 말장난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어떤 게임에 '일반전'이 있다는 것은 '일반전'이 아닌 게임 모드도 있다는 것이고, 그것들이 대개 등급전/경쟁전입니다. 그러므로 "일반전의 존재는 등급전의 존재를 시사한다"고 할 수 있겠죠.

이 유머는 그 개념을 게임이 아닌 섹스에 적용하여, "섹스 등급전"이라는 어이없는 개념을 합리화시키는 데 있습니다. 그림으로 보겠습니다.

'게임 범주'안에 "캐주얼한 게임이 존재한다"가 "경쟁적 게임이 존재한다"를 "시사한다"는 도식이 있고, 그 도식에서 게임을 섹스로 바꾼 도식이 존재하고, 둘을 잇는 화살표에 '게임 → 섹스 함자'라는 라벨이 붙어 있다.

저 유머 속에 담긴 아이디어는 이런 도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물론 다른 도식으로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언어와 개념의 범주는 제가 정의한 적도 없거니와, 위에서 쓴 '말장난'이라는 표현은 이것을 범주론 개념으로 설명하기 위해 조금 억지를 부린 설명에 가깝기 때문이죠.)

한편, 이 도식은 어떤 의미로는 틀렸습니다. 세상에 casual sex는 존재하지만, ranked competitive sex는 그와 같은 수준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죠. 이게 위에서 강조한 '실패'하는 것의 의미입니다. 그 실패가 우리 인식의 어떤 부분을 자극하기 때문에 유머로 성립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언어와 개념의 범주에서 실패하지 않는 도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격언이라거나, 속담 같은 것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자면 "달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같은 말을 생각해 보시면 위와 같은 도식이 바로 떠오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긍정하기보다는 일견 달변이 더 좋아보인다는 점에서는, 실패에서 그렇게 멀지 않아보이기도 있습니다. "웃기라고 한 말인데, 곱씹어보니 진짜같다"는 말이 나오는 유머에서도, 그렇게 정확하게 정의하지 않은 '실패'와 '성립'은 그렇게까지 딱 자를 수 있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자, 장황하게 말한 것 같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 아닙니까? 결국 뭐 비유나, 수사학 같은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이렇게, 수학적으로 잘 정의되지도 않고, 수학의 정리를 쓸 수도 없는 개념들을 수학의 도구를 빌어서 설명하는 건, 이게 제가 유머를 이해하기 위한 관점이기 때문입니다. 최불암과 그의 아들이 버스 안에서 울기 시작한 것도, 양면성을 드러내기 위해 열림교회가 닫힘 사진을 발표하고 개박살나는 것도, 신데렐라가 구석을 받고 순욱과 사이가 틀어지는 것도, 제게는 이 틀에서 해석됩니다. 그리고 제가 하는 일에 반영되고 있지요. 이 관점을 공유하고, 다른 분들이 이 관점을 통해서 새로운 유머를 만들어내는 것을 보기 위해 이 글을 씁니다.

아, 그리고 맨 위에 '유머의 아이디어'라고 했지요? 아이디어는 이 방법론으로 얻어낼 수 있지만, '표현'은 완전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 부분도 성공적인 유머를 위해서는 고민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아이디어보다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