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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가을

정진명

서지정보

서명: 중세의 가을
저자: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
역자: 이희승맑시아
출판사: 동서문화사
출간일: 2010년 12월 12일
원서명: Herfsttij der Middeleeuwen(네덜란드어)
원서 출간일: 1919년

생각

『중세의 가을』은 요한 하위징아가 쓴 역사서로, 소위 (유럽의) 중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느꼈는지를 조명한 책입니다. 14~15세기에 여러 유럽 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부르고뉴를 기반으로 그 영향을 받은 네덜란드, 프랑스 등에서 기사도, 종교(가톨릭), 회화, 문학,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 등을 살펴본 책입니다.

(아마도) 번역자가 쓴 취재 기행문과 해제에 의하면, 이 책은 이전까지 유행했던 관점이 놓치고 있던 점을 제시한 저술입니다. 유럽의 근대로 이어진 르네상스에 대해 고찰하기 위해 중세 후기에서 르네상스의 기원을 찾던 기존의 접근 방식을 떠나, 중세 후기에서 중세의 쇠락하는 모습을 관찰하고 묘사합니다. 제목의 가을이란 쇠락하는 계절로서의 가을인 거지요.

이 책은 주로 중세의 '정신'에 대해서 논하는데, 이 정신이라는 건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그 때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했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종교적인 영향력 아래에서 오늘날 우리(와 저자의 동시대인)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경건한 태도라거나, 회화나 문학을 통해서 엿볼 수 있는 미감이라거나 하는 것이지요. 단호할 정도로 저자의 동시대인의 정신과 중세인의 정신을 나누어 말하고 이미 시대가 변해가는 데에도 이전 시대의 가치를 칭송하는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덤덤히 서술하는 것을 보고 있자면, 자연스레 저자가 중세를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와 다른 조건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는 듯 하지요.

제가 이 책을 읽기로 생각한 건 대충 두 갈래의 생각에 근거합니다. 하나는 『호모 루덴스』 읽기에서 이어지는 놀이 정신의 탐구이고, 다른 하나는 여러 창작물에서 등장하는 '중세 판타지' 장르에 대한 제 해상도를 높이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중세 판타지, 아니면 중세조차 생략하고 판타지라 부르는 장르에는 실제 유럽의 중세에서부터 빅토리아 시기까지의 다양한 이미지가 섞여 있지요. 사람들의 삶의 모습. 신분 제도와 종교의 영향력. 궁중 문화와 귀족 문화. 작품의 편의와 미학적 이유에서 기인한 장르적 문법으로 꽤 많은 것이 생각보다 근대적인 풍경이 묘사되는 것이 오늘날의 판타지 장르라고 생각하는데, 제게 검과 마법이 있고 인간이 아닌 것과 싸우는 것이 주된 내용인 판타지 작품은 중세적인 정신을 여전히 근간에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 다 모험이야기라고 하더라도, 십자군 원정과 기사단 되기에 대한 모험 이야기와 미지의 세계와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시대에서 모티프를 따왔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오늘날 작품들에서 이런 것들을 구분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최소한 제가 무언가를 만들 때 기준으로 삼을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읽는 데 시간도 꽤 걸렸고 음미하자면 꽤 파고들 수 있는 내용인데 당분간은 이 책을 읽고 머리 속에 남은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변화하기를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잘 모르는 시대의 역사서를 읽어놓고 내용이 다 머리속에 정리되길 기대하면 안 되겠지요. 부르고뉴… 저지대… 거의 『먼나라 이웃나라』 이후로 제대로 본 적이 없는 화제들이니까요. 『크루세이더 킹즈 3』나 오랜만에 켜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