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정보
서명: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저자: 홍한별
출판사: 위고
출간일: 2025년 2월 15일
생각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는 번역에 관한 에세이입니다. 사실 무슨 책인지도 잊어버린 채로 읽기 목록에 넣어두었다 읽은 책이라, 번역에 관한 책인 걸 알고 놀랐습니다. 아무튼 번역은 제 관심사 중 하나이기 때문에, 우연히 만난 걸 기뻐하며 읽게 되었습니다. 번역 에세이를 읽는 건 『혼자여서 좋은 직업』 이후로 처음인 것 같네요.
책은 『모비 딕』에 나오는 흰 고래가 포착하기 어려운 것의 표상이라는 이야기로 시작해, 이 책의 기획은 번역을 그러한 흰 고래를 비롯한 상징들에 비유하려는 시도였다는 이야기로 마무리됩니다. 읽는 내내 에피소드 하나들이 묵직하고, 저자가 책에 깊은 생각을 담았다고 느끼게 되는데, 그 뒤에 마무리 부분의 구성에 대한 설명을 읽고 책을 되짚어보면 개별 에피소드 뿐 아니라 구성까지 짜임새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른 분들에게 추천할만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뭐 제가 추천하지 않아도 이미 유명한 책 같습니다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자의 번역관이나 논쟁적인 지점에서 내린 판단들에서는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을 여럿 발견하곤 합니다. 동어반복이 언어의 죽음이라는 표현이나, 일부러 수입하지 않아도 문화가 놀라운 속도로 확산되고 영향을 주고 받기 때문에 직역을 통해 '낯설게 하기'의 효과로 문화를 다채롭게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는 판단들이 그렇습니다. 왜 계속 '바벨탑 이전'이 실존했던 것처럼 이야기하는 건지도 조금은 이해하기 어려웠고요.
하지만 결정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것은 AI 번역과 사람의 번역에 근본적 차이를 두려 하는 이항대립입니다. AI 번역과 사람의 번역이 근본적으로 다르기야 하겠지요. 애초에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진 두 종류의 기능이 같은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기를 바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물에 구분할 수 있는 차이가 있다는 결론은 거기에서 바로 도출되기 어렵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무엇이 근본적이고 구분할 수 있는 차이인지에 대한 논의는 더 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AI 기술은 인간이 만들어낸 결과물을 재현하는 것이고, 실무에서 일부 채택될 정도로는 어느정도 필요한 기능을 해내고 있다고 봐야겠지요.
저는 여전히 우리가 AI 번역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 모른다고 보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자동 번역된 텍스트가 사람의 번역보다 직역에 가깝다"(dp.203/347)는 선언이나, "기계 번역을 '기표만을 번역하는 번역'"(dpp.304-305/347)이라고 인용하는 부분들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것은 그래서입니다. 저자가 수행한 것처럼 GPT-4o 모델이 번역한 결과물의 경향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는 있지만, 그 경향이 다른 데이터를 학습시키고, 다르게 튜닝한 모델에서도 유지되리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AI 번역이 인간 번역 과정에 있어야 할 어떤 의미 체계를 우회할 것 같다고는 생각하지만, 그게 기표만을 남기고 기의가 사라진 것이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전 세대의, 아니면 이전 이전 세대의 번역기, 그러니까 일본어의 신음 소리와 팥고물을 구분할 수 없었던, 우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아는' 번역에는 해당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대형 언어 모델은 이미 판례속에 존재하는 성차별과 인종차별을 재현할 수 있습니다. 별다른 맥락이 없어도 농담을 이해하는 것'처럼' 답하기도 하지요.
제가 아는 AI 번역은, 우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 모르는 다른 종류의 번역과 제일 비슷합니다: 사람 뇌의 작용이지요. 저는 이 시점에서 "기계가 아무리 똑똑해져도 기계에는 의식이 없다"(dp.305/347)는 이야기가 중요한지 모르겠습니다. 설의 중국어 방 생각도 나지요. AI 번역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사람의 번역과 사람의 언어활동에도 있습니다. "우리가 쓰는 언어를 모호한 번역 투의 흐릿한 혼종으로 만들어"(dp. 306/347) 가는 것은 기계 번역과 대형 언어 모델일 수도 있지만, 우리의 언중은 그렇지 않습니까? 훈련된 번역가는 그것을 피할 수 있겠지만, 범용한 번역가는 그럴 수 있습니까? "기계 번역이 용이하도록 글을 쓰게"(dp.306/347, 인용) 되어 언어의 폭이 줄어드는 것은 무섭고, 신생아의 이름이 '외국어(사실상 영어)'로 발음되기 쉽게 골라지는 과정에서 한국어 이름의 폭이 줄어드는 것은 무섭지 않습니까? 제가 이항대립을 일반적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이래서입니다. 무언가에 붙어 있는 나쁜 성질을 들여다보는 행위는, 주의하지 않으면 그 대립항도 지니는 나쁜 성질을 간과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저자가 말하듯 "더 평범해지는 쪽이 아니라 더 탁월해지는 쪽으로 가야"(dp.308/347) 합니다. 저는 그 탁월함의 추구는 파편화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어에서 일본어 번역투의 영향을 밀어내야 한다는 사람들이 무엇이 번역투인지 밝혀내고 간과된 우리말의 사용을 촉진하며, 표준어 규범을 준수하는 사람들이 '1도 없다'와 '짜장면'이 규범에 어긋난다며 화를 내고, 일본어 웹소설을 번역하는 사람들이 무책임하게 번역투를 남발하고, 영어로 된 전공서적을 번역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수동태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그걸 대충 읽은 이과생들의 말투가 이상해지고, '얼얼하다'를 【어럴하다】라고 발음하는 사람들과 【얼럴하다】라고 발음하는 사람들이 모두 존재하고, 때로 싸우고, 가끔 사라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번역자가 번역한 글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입니다.(참고: dp.303/347) 스티븐 킹이 철학적이고 난해한 작가가 될 수 있듯이 말이죠(dp.192/347). 저는 그런 의미를 부여하는 경험이 많고 다양했으면 좋겠습니다. 오역을 하고 싶거나 AI 번역된 글을 읽고 싶지는 않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