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정보
도서명: 은유로서의 건축
저자: 가라타니 고진
역자: 김재희
시리즈: 패러다임 총서
발행처: 한나래
출간일: 1998년 11월 30일
원서명: Architecture as Metaphor
원서 출간일: 1995년 10월 5일
생각
나는 철학을 모르고 이런 글을 읽는 법을 훈련한 적도 없다. 그러니까 이 책에서 이미 이런 글을 읽는 데 익숙한 사람에게는 헷갈릴 일이 적을 단어라거나, 이 정도는 알리라 하고 가정하고 넘어가는 개념어나, 일상적인 언어에 약간의 의미를 담아서 쓰는 단어 같은 걸 구분할 수 없고 읽기가 좀 어렵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끌어올 수밖에 없는데, 예를 들면 칸트의 건축술architectonics이 수학의 범주론같다거나, 크리스토퍼 알렉산더의 반격자 형태로 조직되는 자연 도시와 트리 형태로 조직되는 인공 도시의 대비를 게임 디자인에서 속성이 추상화되는 단계로 이해한다거나 하는 일들이 그렇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수학적인 내용은, 내가 아는 단어라도 내가 아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데,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은 부분이 그렇다.
플라톤이 도입한 증명 방법은 귀류법reductio ad absurdum, 즉 하나의 명제가 동의를 얻고 확립된다면, 그것과 모순되는 것은 어떠한 것이든 불건전한 것으로 멀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유클리드는 이 틀을 공리 체계로 발전시켰고 그 공리 체계로부터 연역될 수 있는 것만 참이라고 가정했다. 이러한 노력들 가운데 어느 것도 수학의 발전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바빌로니아에서 시작되었던 대수학의 발전을 방해했다.(p. 71)
귀류법은 내가 아는 단어이지만, 뒷부분은 내가 아는 수학의 언어로 되어 있지 않다. 또, '플라톤의 귀류법'과 '유클리드의 공리 체계'가 수학의 발전에 필수적이지 않았다는 문장 또한, 수학을 역사적으로 배우지 않은 내게는 이상하게 들린다. 내가 공부한 건 21세기에 학부에서 가르치는 수학이고 수학사는 아니니까, 플라톤과 유클리드의 작업이 그 시절 수학의 발전에 있어 어떻게 평가되는지는 내 관심사가 아니긴 하다. 한편 수의 범주를 확장해 나가면서 결국 괴델이 모순 없는 체계의 불완전함까지 도달하는 서사의 노트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학에서 비합리적인 것[앞 문장에서 무리수와 동등하게 사용함]은 자연수의 비율ratio에 의해서 기술될 수 없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X²=2와 같은 2차 방정식의 형태는 존재할 수 없다. 차라리, 그것은 X = 2 / X라는 식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X는 X를 알기 위한 선행 조건이다. 경우가 그렇다면 앞서 말한 방정식에서 피타고라스 학파가 직면했던 것도 이미 자기 지시적 역설이 아닌가? 비합리적인 수, 즉 무리수의 금지는 사실상 자기 지시성의 금지와 똑같다.(p. 122)
이렇다면 누군가는 2X = 1도 존재할 수 없는 방정식이고 X = 1 - X와 같은 식으로 표현되어야 하고 따라서 X는 X를 알기 위한 선행 조건이므로 '합리적인 것'인 유리수 또한 자기 지시성이 유발하는 역설을 피하기 위해서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나? 이 부분이 글의 맥락상 이해가 안 되지는 않지만, 무리수와 비합리성을 병치해 말하며 역설과 연관짓는 시도는 말장난처럼 느껴진다.
실수는 결국 자연수에 의해 기술된다. 예컨대 하나의 실수 0.24910370……이 자연수 0, 2, 4, 9……로 기술된다는 것은 자연수가 근본적이라는 점을 입증한다.(p. 118)
이 부분은 대체 무엇을 입증한 것인지 모르겠다. 내가 공부한 좁은 범위 안에서, 자연수 또한 실수나 무한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추상적인 대상이다.
이런 식으로 내가 비교적 익숙한 대상인 수학에 대해서는 읽다가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어색한 구절을 맞이하고,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연결해 씹어 삼키는 데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핵심 개념어를 모르는 것도 있어서 책 후반부에서 결국 저자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는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그런 부분에서도 인상에 남는 구절이 있다.
법정에서는 서로 반대되는 양편 모두 하나의 공통된 규칙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략)… 법의 그 말놀이를 인정하고 옹호하지 않는 사람은 법정 바깥으로 쫓겨나거나 재판관들에 의해 무자격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p. 185)
비트겐슈타인은 그리하여 플라톤식의 대화를 문제삼는다. 그것은 타자를 포함하지 않으며, 그리고 종종 하나의 독백이 되기 때문이다. 타자를 내면화하기 위해서는 그 타자가 한 무리의 공통 규칙들을 공유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타자라는 말뜻 자체가 이미 어떤 무리의 공통 규칙들도 공유하지 않는 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닌가? 대화란 오직 그런 타자와만 하는 것이 아닌가?(pp.186-187)
법정의 규칙을 본인이 덮어쓸 수 있다고 믿으나 쫓겨나지도 무자격자라는 낙인을 찍히지도 않는 인간들이 발호하고, 서로가 서로를 대안 현실 속에 산다고 주장하며 대화의 가능성을 하루하루 잃어가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에서, 좀 더 파헤쳐보고 싶은 구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