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정보
서명: 알고 있다는 착각
저자: 질리언 테트(Gillian Tett)
역자: 문희경
발행처: 어크로스
출간일: 2022년 8월 10일
원서명: Anthro-Vision(영어)
원서 출간일: 2021년 6월 8일
생각
『알고 있다는 착각』을 조감하는 한 가지 방법은 원서의 제목과 함께 올려놓고 보는 것이다. 원서의 제목은 Anthro-Vision, 직역하자면 『인류학 시야』정도가 되겠다. 이런 제목을 달고 있는 책이 한국에서는 『알고 있다는 착각』이 되었다. 왜? 는 이 책을 조감하는데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두 제목 다 어떠한 측면에서 이 책을 잘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을 한 문장으로 줄인다면 “『알고 있다는 착각』을 벗어나는 것은 유익하고 필요하며, 『인류학 시야』는 그것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법이다.”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인류학의 전통적이거나 응용적인 접근이 학문 밖의 영역에서 유용하게 쓰인 경우들을 다루고 있다. 인류학을 전공하고 기자로서 활동하는 저자는 자신의 경험, 업계 사례들을 통해 위에 적은 문장을 반복하고 부연한다. 읽으면서 놀랐던 점은, 내가 사례들과 관련된 책을 조금이나마 읽어봤다는 점이다.
프롤로그. 물고기는 물을 볼 수 없다 -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과 즐겁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는 법(이하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는 법”)』, 리 매킨타이어, 위즈덤하우스
1. 새의 눈, 벌레의 눈 - 『신부 이야기』, 모리 카오루, 대원씨아이
3. 낯선 전염병과 싸우는 법 - 『리아의 나라』, 앤 패디먼, 반비
9. 우리가 사무실에서 ‘정말로’ 하는 일 - 『저주받은 혁신의 아이콘: 제록스 팔로알토 연구소』, 마이클 A. 힐트직, 지식함지
한 권의 책을 콕 집을 수 없더라도 나는 이 책의 사례를 읽으며 내 경험을 꽤 많이 꺼내서 읽을 수 있었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 필요성을 납득시키기도 어려웠던 CDO, CDS로 인해 발생한 파국 에피소드를 읽으며 나는 풋옵션이 왜 필요한지를 공부하던 학부생 시절을 떠올렸고, 민족지학을 가져와 사용자 연구를 진행한 에피소드를 읽으며 내가 게임업계에서 본 “테스트플레이를 관찰”하는 방법론이 어디서 왔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대다수가 코로나 사태와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인 시대를 살았다.
이 책은 ‘어떤 문화 사람들과 다른 문화 사람들이 만났을 때 생기는 일’ 혹은 ‘어떤 괴짜들이 대체 무슨 일을 왜, 어떻게 하게 되었는지를 알고 싶다’ 같은 경우에 인류학이 이렇게나 유용하다고 주장하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경우는 내가 위에 적은 것처럼 의외로 많고 일반적이며 그 모든 것에 인류학이 기여할 수 있다고 하면 조금 보폭이 커 보인다.
뻔뻔한 이야기이지만, 나도 살면서 생각이라는 걸 한다. 게임업계에서 일하는 일은 “개발자 관점”이 “플레이어 관점”과 괴리되지 않으면서도 플레이어에게 좋은 것과 “기업”입장에서 좋은 것을 분리할 줄 알아야 하는 일이었다. 가끔은 내가 참여한 프로젝트를 플레이어 입장에서 비판하고 개발자 입장에서 사기가 떨어지기도 했고, 개발 구조에 대해서 잘 모르는 플레이어가 개발 과정에 대해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고 어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비슷한 관계는 많을 것이다. 정치인과 유권자, 작가와 독자(혹은 비평가) 같은 관계들 말이다. 나는 여기서 직접 일을 하고 이해관계가 크게 걸려있는 “내야”와, 조금 거리만 두고 내야가 한 일의 결과 위주로 보게 되는 “외야”의 관계가 어떤 관계여야 건강할지 고민했다.
또는,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는 법』은 세계적으로 더 무시할 수 없는 음모론자들과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사람들, 대안현실 추구자들에 대한 문제의식을 다루고 우리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나는 인류학이 이러한 고민들에 대해서 좀 더 체계적이고 동료 심사를 통과한 사유들을 많이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당장 이 책은 내 고민에 대한 한 가지 해결책을 제시한다. 내야는 언제나 터널 시야에 갇힐 위험에 처해 있으며, (훈련된) 외야의 적절한 개입으로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는 법』에서 제시하는 접근 방법은 최소한 그들과 대화하고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인데, 이건 아예 책에서 “인류학의 두 번째 핵심 원리”로 다루고 있다.
이미 인류학은 이 분야의 많은 질문에 어느 정도 답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왜 보폭이 커 보이는가? 인류학이 쌓은 체계적 접근이 현장에 잘 가 닿을 수 있는 구조인지 의심되기 때문이다. 이 책은 곳곳에서 인류학의 크고 작은 역사와 논란, 후배 인류학자들에게 보내는 메세지를 담고 있는데, 이 행간에서 읽히는 내용으로는 전망이 조금 어두워 보인다.
- 기업, 군사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는 인류학자들에 대한 학계 내부의 우려
- 유럽과 북아메리카 위주의 학계 구성
- “인류학”이 학문이기 때문에 갖는 학위 제도 자체의 폐쇄성
- 펀딩이 언제나 끊길 수 있어 장기적으로 유지되지 않는 기업연구
이런 상황에서 내가 느껴지는 것은, 인류학이 필요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에 인류학적 접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충분히 닿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수요는 있지만, 공급이 없으면 사람들은 바퀴를 재발명하고 만다. 충분히 인류학에 관한 저술일 수 있었던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는 법』 본문에서 “인류학”이라는 단어는 딱 한번 검색된다. 이 책에서도 다룬 서아프리카 에볼라 창궐 사태를 언급하면서.
이 책에서 언급하는 인류학의 역사는 인류학이 19세기 유럽의 제국주의를 위해 복무해온 역사를 포함한다. 이런 역사는 한편으로 학계 밖으로 인류학이 나가는 것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가 하면, 여전히 인류학이 서구의 목소리에 지배당하는 근본적인 원인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그런 학문이 아이러니하게도 민주주의를 위해 힘을 내 주었으면 한다. 나는 민주주의를 믿는 사람으로서, 다양성과 문화 상대주의를, 경청의 가치를 아는 인류학이 역할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 오늘날 민주 사회는 세계 곳곳에서 파열음을 내고 있다. 민民이 스스로의 주主인으로서 더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민이라는 내야가 지닌 터널 시야를, 알고 있다는 착각을 인류학이 훈련된 외야로서 트여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