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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

전자책 저노력 콘텐츠 거르기

나는 종이책 서점이 갖는 큐레이션 기능의 대체제로 『신간 전권 훑기』를 하는데, 하다 보면 한 출판사의 책이 이어져 올라와있는 경우를 본다. 출판하는 책이 많은 출판사가 등록을 한 번에 하는 경우가 있고(진한엠앤비가 각종 정부기관 출간실적으로 카운트될 법한 책을 주르르 올리거나), 그 중에는 한 시리즈의 책이 수십권 올라오는 경우도 있다(자치통감 전 294권이라거나).

내가 이 과정에서 견디기 어려운 건 저노력 콘텐츠(한국말로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일단 low effort contents의 번역어이다)들이 그 목록에 가득 들어차 있는 상태로 스크롤을 내리는 것이다.

전자책에 있어서 저노력 콘텐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 콘텐츠를 쓰는 데 (기존에 필요하다는 믿음이 있는 종류의) 노력을 최소화한다.
    • 저자를 섭외하거나 직접 원고를 작성하여 책을 쓰는 건 말도 안 되고, 보통 퍼블릭도메인인 원고를 어디선가 얻어와서 책으로 엮어 낸다. 유명하고 사망한지 좀 되는 작가들의 책이 리디북스에 얼마나 많은지 알면 놀랄 것이다. 퍼블릭 도메인인 외서를 그대로, 혹은 기계번역을 돌려서 낸 것으로 보이는 책의 수도 상당하다.
  • 요즘은 AI로 내용을 작성하는 것으로 보이는 경우도 많다. 책 소개에 AI의 도움을 받아서 작성했다고 쓰는 것들은 그나마 낫다.
    • 하나의 출판사가 하나의 카테고리 내에서(예: 직업) 전문적이어 보이는 소재(예: 특정 직업)를 가지고 한 번에 50종이 넘는 책을 업로드한다. 며칠 지나면 반복한다.
    • 저자는 (출판사명) 편집부로 통일되어 있다.
    • 출판사 표기와 저자를 다르게 하는 경우도 있는데, 애초에 책표지 이미지도 같은 형태이고, 소개글 템플릿도 똑같아서 출판사 표기가 다른 게 의미가 있는지… 출판사의 레이블이라고 하면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닌데, 그러면 출판사는 누구인가? 저자들은 모두 다른데, 저자 소개글들을 보면… 실존하는 저자들인지조차 의심이 간다.
  • 콘텐츠가 저노력이라고 해서, 팔려는 노력까지 저노력이라고 할 수는 없다.
    • 어떤 저노력 콘텐츠 생산자는 '책 제목' 란에 책과 관련된 검색어라고 할 만한 내용을 쉼표로 연결해서 올렸다. 구글 플레이나 앱스토어에서 앱을 더 많이 팔기 위해 사람들이 쓰는 앱 스토어 최적화(ASO)같은 내용을 전자책에 적용한 것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웹소설 사이트 메인페이지에서 노출되는 형태 때문에 웹소설 제목이 일정 길이를 넘기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는 얘기를 본 기억도 나고)

품질이 낮은 콘텐츠와 저노력 콘텐츠는 형태가 조금 다르다. 품질이 낮은 콘텐츠는, 그냥 품질이 낮은 콘텐츠이다. 저노력 콘텐츠는 어떠한 목표를 가지고 만들어진다. 많은 수를 뿌리는 데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어지고, 많이 만들어진다.

저노력 콘텐츠라서 품질이 낮아보이는 책도 있고, 저노력 콘텐츠가 아니지만 품질이 낮아보이는 책도 있다. 내가 목록에서 보고 싶지 않은 건 저노력 콘텐츠이다. 너무 많다. 최근에는 그런 책들을 전권보기에서 거르기 위한 유저스크립트도 만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