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정보
게임명: HUMANKIND™
개발사: Amplitude Studios
배급사: SEGA
출시일: 2021년 8월 17일
장르: 대전략, 문명류
생각
사실 『시드 마이어의 문명 7』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불려나온 감이 없지 않은 게임입니다. 예전에 샀었고, 한 판 해보고 뭔가 생각만큼 재미가 없어 다시 켜지 않았던 『휴먼카인드』입니다만, 설 연휴에 『문명 7』을 기대 반 우려 반으로 기다리며 다시 플레이해 보았습니다.
제가 이번에 휴먼카인드를 다시 하면서 아쉽다고 느낀 부분은, "그래서 내가 누구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약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층위의 문제인데, 내 '문명'에 속한 사람들이 누구냐는 질문과, 나를 비롯한 지도자들이 누구냐는 질문을 각각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휴먼카인드』, 그리고 『문명 7』은 기존의 문명 시리즈와는 달리 시대별로 다른 '문명'을 고를 수 있는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 접근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을텐데, 게임 시스템을 좀 더 깊이있고 복잡하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들을 선조로 삼고 어떤 인물을 부각하느냐를 당대의 기준으로 결정하는 민족주의적 역사관을 벗어나려는 시도일 수도 있죠.
문제는 이 과정에서 그래서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알려주는 명확한 지표가 있었다가 없어진다는 점입니다. 『문명 6』에서 제가 이끌던 사람들은 "대한 제국"의 사람들이었지만, 『휴먼카인드』에서는… 모르겠네요. 고대에는 바빌로니아라고 불렸고, 고전 시대에는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게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각 문명을 어떻게 불렸을까요?
이 문제는 지도자가 누구냐에 대한 문제로도 이어집니다. 『휴먼카인드』의 상대 지도자들은… 그냥 나랑 같이 보드게임을 하는 동네 친구들(좀 글로벌한)처럼 느껴집니다. 이게 나쁘지는 않을 수도 있는데, 이 과정에서 저는 게임에서 역사를 다루는 감각 부분이 깎여나가고, 그냥 규칙의 조합만으로 게임을 즐겨야 하는 상황이 됩니다.
물론 이 장르의 게임을 주어진 규칙 안에서 승리하는 것만으로 즐길 수 있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반대로 이러한 게임에서도 내가 만들어나가는 역사에 이입할 수 있는 사람도 있겠죠. 애초에 문명 시리즈처럼 한 명의 지도자가 수천년을 살아서 지배하는 게임에 무슨 역사 타령이냐고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뭐, 저한테는 『문명 6』까지는 대충 내가 어떤 사람들을 이끄는 지도자이고, 내가 하는 선택들이 어떤 역사를 만든다는 감각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크루세이더 킹즈 3』나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4』처럼 잘 알지도 못하는 등장인물, 단어와 개념들과 씨름하지 않아도 되는(그리고 패배를 훨씬 덜 겪어도 되는) 캐주얼함이 절묘하게 만나는 지점에 존재하고 있었죠. 『휴먼카인드』는 그런 게임은 아니었습니다.
『문명 7』도 비슷하게 고민이 됩니다. 시대에 따른 다른 문명에 대한 우려는 『휴먼카인드』와 비교적 비슷하고, 지도자에 대한 우려는 『휴먼카인드』보다는 낫겠지 싶으면서도 우려됩니다. 공자나 에이다 러브레이스, 마키아벨리와 같은 인물이 이끄는 『시드 마이어의 문명』에 익숙해지는 건 보드게임 같이하는 옆집 친구가 옆나라 왕이나 대통령 역할을 맡는 모습에 익숙해지는 것과는 거리가 있을 수는 있어도, 대충 하쿠레이 레이무가 이끄는 환상향 제국이 프레슬라프의 종주권을 두고 알토리아 팬드래건의 브리튼 제국과 신경전을 벌이는 광경에 익숙해지는 것과는 비슷한 노력을 요구할 것 같거든요. 게임 이왕 이렇게 만들거 지도자 모드 만들기 편하게 만들어줬으면 좋겠습니다. 음, 『문명 7』 얘기기도 하지만 『휴먼카인드』에도 적용되는 바람이긴 하네요.
여기까지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면, 제 머리속은 안타깝게도 하나의 민족의 얼이 선사시대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다는 신화 근처에서 편안함을 찾는 것 같습니다. 아닌가? 지금까지 나온 게임들이 근대 민족주의적 사관을 비판하는 시도를 충분히 열심히 못 한 건가? 예를 들면 대충 몇 년 정도 지나고 나면 림월드처럼 "당신의 문명의 이름을 뭐라고 짓겠습니까?" 입력창 하나만 띄워줬어도 좀 달라졌을까? 음. 어렵군요. 제 게임 개발 커리어에서 시도해보기에는 너무 먼 것 같습니다.